중국의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자기 자신을 바쳤던 주룽지에 대하여 살펴보면
주총리는 모택동과 같은 호남성 출신으로 명나라 황족의 후예로 태어나기전에 아비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마저 주총리가 10살이던 해에 여의고 큰아버지 슬하에서 성장했으며, 어려운 성장환경이 그를 학업에 전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공계 명문인 칭화대(靑華大)에서 줄곧 장학생으로 졸업했으며, 4학년 때는 학생회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중국에는 혁명원로의 자제들인 태자당, 어릴때부터 공산당의 인재로 관리되어 성장한 공산주의 청년당(共靑團), 짱쭤민(江澤民)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는 샹하이방(上海幇)의 세가지 권력집단이 있는데 주총리는 공청단과 샹하이방입니다.
현재 개혁을 위하여 매진하고 있는 중국의 지도자들은 몇 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이공계 출신(특히 청화대) 즉 테크노크라트이며,
둘째 상해에서 근무경력이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당시 주석인 짱쭤민(江澤民) 역시 상해교통대학(전기과) 출신의 테크노크라트로 상해 당 서기였고 이때 주룽지는 상해시장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전 주석인 후진타오(청화대), 우방궈(상해,청화대), 쩡찡홍(상해), 원자바오, 최근에 돌아가신 리커창(李克强) 역시 테크노크라트입니다.
특히 주룽지는 거시경제에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상해의 푸동개발을 추진하여 크나큰 성과를 거둔바 있으며, 주룽지는 당 정치국 회의에서 "백 개의 관을 준비하고 있고, 그 중 하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라는 발언 뒤 주룽지의 개혁정치로 피해를 입은 금융기관과 국영기업의 간부들이 청부살인을 기도하였으며, 고명딸의 시아버지, 조부의 묘소도 그 피해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의 개혁정책에 대한 불만과 저항은 실로 대단하였고 중국경제를 살리고자하는 그는 인기와는 담을 쌓은 지 오래였고 이렇듯 그의 단호한 발언은 불같은 성격과 강인한 의지를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 번 눈물을 흘리는데 그것은 나토의 베오그라드 중국영사관 오폭 시 희생자의 영정 앞에서 양자강 범람 시 2억 3천만 명의 이재민과 3천여 명의 사망자 앞에서 재산을 잃으면 나라가 다시 줄 수 있지만 사람의 생명은 다시 줄 수 없다 라고 하며 눈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국가적 재난과 재해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개인적인 즉 인간적인 차원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춘추전국시대 개혁가 상앙의 일대기를 엮은 상앙변법을 관람할 때 법치주의에 근거하여 태자의 코를 베는 등 과감한 개혁정치를 시행했던 그가 태자가 왕위에 오르자 반역죄로 몰려 사형을 당하는 대목에서 눈물을 흘렸으며, 후에 개혁의 좌초로 처형되는 상앙의 비극에서 개혁에 일상을 살아온 자신의 외로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는 철한(의지가 강한 사람), 일장(복잡한 행정을 도장하나로 처리한다는 뜻), 웅계(싸움닭)의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외부의 숱한 역경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개혁을 추진 강인하고 원리원칙에 따르는 인물로 각인되었습니다.
한나라의 개혁 뿐 아니라 기업의 개혁에서도 어려움은 많이 따르는데 시기와 질투, 모함으로 개혁이 실패할 경우 더욱 어려운 입장에 처할 수도 있지만 회사와 후배들의 앞날과 제일 중요한 나의 앞날을 위해서라면 한 번 쯤은 과감하게 도전해 볼 만 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할 것은 상앙은 능지처참을 당하고 자기의 관까지 준비하고 시작한 주룽지조차도 암살의 위기까지 모면하고 자기 사돈이 죽고 조상묘가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었음을 상기한다면 개혁이란 정말로 어려운 것입니다.
출처 : 내관도 준비되어 있다. 김승환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