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은 제가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곧이곧대로 사는 그 성격과 심지어는 바보스러움마저 느끼지만 결국은 그가 승리하는 권선징악적인 면마저 느끼게 합니다. 현재 서점에는 등소평 평전과 같은 등소평에 관한 책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록과 행적을 통하여 그의 인생을 고찰하고자 합니다.
등소평(鄧小平)은 사천성(四川省) 객가 부농의 집안에서 첫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m 50㎝의 단구이지만 다부진 몸매에 거침없는 언행이 등소평(鄧小平)을 세 번에 걸친 실각과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객가는 전쟁으로 중원에서 남하한 한족의 후손으로 피난민 특성상 중화권 각 지역에 퍼져 있으며, 다소 폐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중국화교들도 고개를 흔들 정도로 화교권에서는 유대인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지며 자기들의 고유 언어를 가지고 있을 정도입니다 객가로는 이광요 수상, 엽검영(葉劍英), 주덕(朱德) 등이 있습니다. 특색으로는 등소평을 나중에 사인방 축출에 지대한 공헌을 한 엽검영(葉劍英)이 개고기를 좋아해서 별명이 식구장군(食狗將軍)입니다. 등소평(鄧小平)은 청년기에 프랑스에 유학하고 거기서 주은래를 알게 되고 공산당에 입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국제적인 감각과 자본주의경제에 대한 감각은 이때부터 키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등소평(鄧小平)의 개혁의 리더십은 그의 리더십과 개혁적인 성향을 분리하여 살펴보고 또 두 가지의 성격이 융화되는 과정을 재검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우선 등소평(鄧小平)의 경우 리더십은 집안의 주변 환경과 그의 출생으로부터 주어지는 선천적인 영향에 영향 받은바 크며, 그의 개혁적 성향은 후천적으로 자신이 노력하여 얻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두 가지 성격의 융합은 그가 중국공산당 내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자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먼저 등소평(鄧小平)의 리더십에 영향을 끼친 선천적 환경에 대하여 살펴보면
첫째 그는 대다수의 중국공산주의자들이 가난한 환경에서 출발한 것과는 달리 부유한 환경에서 출발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부를 축적한 지주로서 마을과 인근에서 지도적 위치에 오른 사람이었으므로 그가 일찌감치 그의 부친으로부터 소작농 또는 부하들을 통솔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리더십을 익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작농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들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간파하고 있었으며 그의 말을 빌자면 사람들의 적극성을 이끌어 내는 방법을 일찌감치 터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그는 중국고대의 치수의 정책을 현실에 적극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후술하겠습니다.
둘째 환경으로부터의 영향은 칼 마르크스, 게오르그 루카치와 같이 공산주의자 중에는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출생한 사람이 적지 않은데 그들의 공산주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등소평(鄧小平)에게도 그러한 모습이 관측됩니다. 따라서 사회개혁을 위하여 부유층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 보다는 객관적 시각을 가질 수 있었으며, 가난하여 무조건 참기만 해야 하는 삶 보다는 부가 인간에게 주는 편리함을 익히 알고 있었고, 부를 가지지 못한 친구들에게 선의를 베푸는 등 연민의 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지주의 입장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부에 대한 편협한 지식이 아닌 객관적인 눈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그 리더십을 자기 개인을 위하여 활용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중국 인민들을 위하여 활용한 것입니다. 그의 그런 모습은 그가 어린 시절 어려운 친구들을 많이 도와주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고 그는 초지일관 어려운 사람들을 어쩌면 부유하게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되는데 그는 누구 개개인이 이익이나 권력이 아닌 중국인민 전체의 福祉富强이라는 커다란 목적에 종사하게 되므로 그가 개인적인 권력투쟁에 의해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도와 구제하는 것이 중국의 인민과 자신들을 위하여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개혁정책의 일관된 원칙이기도 합니다. 즉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黑猫白猫論)’라는 이야기에서처럼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중국 사람들을 잘 살게 한다는 대명제하에 자본주의의 장점을 도입하는 것이 중국인민들의 적극성을 이끌 수 있다는 판단 하에 개혁의 길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 후천적인 이유는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어려서 개인교수로부터 한문을 익히고 현, 성의 중심지로 진출하여 보다 나은 교육의 단계를 거치게 된다 . 물론 거기서 프랑스 유학을 갈 수 있는 근검공학이 길도 알게 되고 프랑스에서 힘들어지자 다시 소련으로 유학하게 되는데 물론 아버지의 역할도 무시할 수 는 없지만, 본인이 지식 탐구를 위한 노력은 남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다 넓은 세계로의 진출로 보다 많은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고자 하는 열망이 없었더라면 즉 프랑스에서의 자본주의 경험이 없었더라면 그는 아마도 자본주의 체제를 일부 도입하는 개혁적인 사상을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그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양쪽 면을 다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선천적 환경에 의하여 부에 대한 편협하지 않은 객관적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처럼 정치체제에 대해서도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은 객관적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그의 인내력은 남달리 강했다고 볼 수 있는데 개혁이란 이러한 인내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한 예로 등소평이 유학을 위하여 프랑스로 가는 배는 맨 아래 칸으로 해면 밑에 있는 곳으로 각종 벌레들이 들끓어 도중하차한 동료들이 많이 발생했음에도 그는 동료들 중 어린 나이에 속하지만 프랑스까지 참아내는 인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인내력은 장정 시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개혁사상을 이끌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으로 주변 사람을 설득하고 자신의 노선으로 유도하고 그에 따른 시련이 닥쳤을 때 이를 이겨나가기 위한 것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내에 대하여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 것이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셋째 자신의 양심과 주체적 의견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인데 그는 소련에서 유학했음에도 국제파와 연관을 깊게 맺지 않았으며, 어느 파에도 소속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귀국 후부터 중앙정부에서 활동한 주은래(周恩來)와 비교해 볼 때 등소평이 중앙무대 진출이 늦어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국제파가 실각할 때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전체적으로 세 번 실각하게 되는데 그의 이런 주관적인 활동이 때로는 모택동으로 하여금 등소평을 실각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의 주체적 성향이 결국은 그를 다시 복권시켰다고도 할 수 있으며, 부하뇌동하지 않는 것이 개혁적인 자세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또 한사람의 개혁적 인물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예에서 알 수 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린 시절 새는 좋아했지만 유독 구관조는 싫어했는데 그 이유를 ‘자기 목소리는 없이 다른 새 흉내나 내는 새는 싫어“ 라고 표현했습니다.
몰론 개혁의 노선이라는 것은 Original의 길입니다. 따라서 벤치마킹 할 수도 없고 어려움이 따르지만 개혁이 완성되었을 경우 커다란 성취감과 대가가 따르기 마련으로 세상을 자기사상을 중심으로 재구성 한다는 의미에서도 보람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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