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등소평(鄧小平)

등소평(鄧小平)- 3. 개혁적 리더십의 시도와 좌절

Digital Nomad 433 2023. 11. 30. 13:14

문화혁명 당시 유배지애서 등소평 가족 사진 오른쪽이 부인인 탁림

 

무엇인가를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의미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본다면 잘못된 점을 고치어 좋게 한다는 개선, 정치체제나 제도 등을 합법적, 점진적으로 새롭게 고친다는 개혁, 어떤 분야에서 기존의 관습, 양식, 이념 따위를 폭력으로 급격하게 바꾸는 혁명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변화시키는 속도와 강도로 구분한 것으로 개선이란 부분적으로 잘못된 점을 좋게 하는 것이므로 좋고 나쁨에 대한 상호간의 의사교류가 이루어진다면 문제될 것은 없으며, 의사교류과정에 단순한 설득을 바탕으로 추진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개혁은 정치체제나 제도 등을 합법적, 점진적으로 새롭게 고치는 작업이므로 개개의 이해관계가 혼재되어 의사교류 및 설득에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고 따라서 개혁은 일정한 힘 즉 권력을 유지하고 있어야만 지속적인 추진이 가능하고 그 힘을 상실했을 때에는 그에 반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중국역사상 개혁의 대표적인 인물인 상앙의 경우 진(秦) 효공(孝公)에게 채용되어 부국강병을 내세워 철저한 법치주의를 시행하여 태자의 코를 베는 형을 집행하지만 진(秦) 효공(孝公)이 죽자 반대파와 왕이 된 태자의 미움을 받아 거열형에 처해집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변화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다. 오늘날 새로운 경영기법을 도입하는 회사의 경우 최고경영자의 확실한 스폰서 십을 요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혁명은 기존의 관습, 양식, 이념 따위를 폭력으로 급격하게 바꾸는 것으로 기존의 틀을 완전히 바꾸는 것인데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대혁명, 문화혁명과 같은 폭력적이고 혼동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등소평(鄧小平)이 주로 새롭게 하기 위해 택하는 방법은 적절한 스피드와 안정적인 면을 추구하는 개혁의 방법을 선택하게 되고 따라서 최고 지도자인 모택동(毛澤東)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을 경우 즉 그가 실질적인 지도그룹에 속할 경우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데 그의 세 번에 걸친 실각과 복권과정을 살펴보면

 

첫 번째 실각은 일찍이 장정시절에 이루어집니다. 당시 국공내전의 전투방법에 대하여 당의 실권을 가지고 있던 소련유학파들은 정규전을 주장하는 반면 실질적으로 전투를 치루고 있던 모택동(毛澤東)은 게릴라전을 주장하게 되는데 여기서 등소평 (鄧小平)은 모택동(毛澤東)의 게릴라전을 지지하고 이에 따라 당권을 쥐고 있던 소련유학파에 이하여 모든 직위에서 해직 당하게 되는데 등소평도 프랑스 유학과 더불어 소련의 중산대학에서 유학한바 있으므로 소련유학파와 인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실질적인 전투를 경험했던 그로서는 게릴라전을 지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더욱이 이 시기에 그의 부인이 다른 남자(당중앙조직부장)에게로 떠나가는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 시기 등소평의 지지를 모택동(毛澤東) 은 평생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실각은 자본주의 제도를 일부 도입하는 신제도를 국가주석인 유소기(劉少奇)와 함께 이끌다가 유소기(劉少奇)와 모택동(毛澤東)의 권력투쟁인 문화혁명과 더불어 시작되는데. 당시 등소평은 유소기와 모든 것을 같이 하고 있었으므로 덤으로 비판당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 예로 모택동은 유소기와 별도로 등소평을 당적을 박탈하지 않아 재기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형식으로 대우하였으며,  그 후 등소평은 프랑스 시절의 동지였던 주은래가 제의하고 모택동의 재가로 복권하게 됩니다. 일설에 의하면 유소기(劉少奇)에 대한 철저한 공격은 그 부인인 왕광미(王光美)에 대한 강청(江靑)의 질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물리학자이며 영어통역사였던 왕광미(王光美)는 모택동(毛澤東)으로부터 국가의 일군이라고 아낌을 받았는데 인텔리겐차이자 모택동(毛澤東)으로부터 국가의 일군이라는 인정을 받으니 강청(江靑)의 노여움을 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번째 실각은 강청(江靑)과의 대립에서 모택동의 지시로 실각하게 되지만 이때에도 당권은 박탈당하지 않고, 세 번째 복권은 명목상 엽검영(葉劍英)의 제의와 화국봉(華國鋒)의 재가로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누구의 제의나 재가없이 중국 사람들이 그의 지도를 원하고 그가 중국을 이끌어 가기를 원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의 실각은 실권자들의 정치노선과 반대노선을 걷게 됨으로써 일어나는데

첫 번째 실각은 국공내전에서 게릴라전,

두 번째 실각은 경제부흥에서 자본주의 제도 도입,

세 번째 실각은 4인방과의 권력투쟁이 그 원인이지만

 

오늘날의 중국의 역사를 볼 때 등소평이 시행하고 지지했던 정치노선이 한때 그의 실각으로 정지되었지만 그가 복권된 후 모두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는데 국공내전에서 강서소비에트지구의 붕괴와 적은 병력과 장비로 많은 병력과 현대식 장비를 가지고 있는 국민당군과의 전투를 위하여 장정을 통한 게릴라전 양식이 불가피하게 전개되었으며,

 

그 후에 경제부흥을 위한 자본주의식 제도의 도입도 어려운 중국의 경제부흥을 위하여 불가피한 일로써 문화혁명의 바람이 가라앉은 후 본격적으로 시행되었고,

 

4인방의 권력탈취 노력도 엽검영(葉劍英) 등에 의해 저지되면서 등소평이 주장한 바는 등소평 자신이 결과를 획득하기 보다는 자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보이고 이것은 그는 누구의 정치노선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진실로 중국 사람들을 위하여 바람직한 방법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문화혁명기에 유소기는 건강을 잃고 사망하였음에도 빅터프랭클의 저서인 '죽음의 수용소'와 동일한 상황에서 등소평은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생존했으며, 오늘날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반면에 임표(林彪), 강청(江靑), 화국봉(華國鋒) 등 지지기반이 없이 모택동에게 개인적 충성을 한 제 2인자들은 최고의 지위에 도달하기 직전에서 실패를 했지만 단순히 모택동 한 사람을 추종하기보다 10억 중국 사람들의 안녕 복지를 위해 노력한 등소평은 어려움을 겪지만 끝까지 남아 성공하게 되고. 우리나라에도 또한 여러분이 속해 있는 조직 내에서도 이러한 상황을 적용시킬 수 있고 조직 내 과연 그런 인물이 누구인지를 파악하여 그런 인물과 Communication을 하고 유대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 여러분에게 바람직한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