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등소평(鄧小平)

등소평(鄧小平)- 2. 치민과 치수의 원리

Digital Nomad 433 2023. 11. 30. 13:09

 

 

 

인간을 비롯한 자연의 만물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개개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본능이라 합니다. 이것은 여하한 주변 환경 또는 외부 압력에도 변화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억제하고 바꾸기는 근본적으로 대단히 어렵고 따라서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이러한 사람 또는 물질의 본능이 장애물로 등장할 경우에는 이러한 본능을 억제하고 바꾸려 하기보다는 적극 활용하고 자연스럽게 발산시켜 그들로 하여금 적극성을 발동하게 하여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그 한 예로 중국의 신화에는 홍수와 치수에 대한 신화가 많은데 그 중 요(堯)임금 시절 이야기를 하면

 

요(堯)임금 시절 세상이 홍수로 인하여 물로 가득하자 요(堯)임금이 치수를 맡길 사람을 찾게 되고 이에 신하들은 곤(鯀)이라는 사람을 추천하게 되는데 요(堯)임금은 곤은 고집불통이라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한다는 이유를 들어 싫어했지만, 신하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마지못해 치수의 일의 맡기게 됩니다.

 

치수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제방이나, 둑을 쌓아 물을 막고 그 흐름을 통제하는 방법과 또 하나의 방법은 물길을 터서 적절히 흘러가게 하는 방법입니다.

 

먼저 곤(鯀)은 첫째 방법을 택하게 되지만 물의 본능인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자 하는 힘을 다스리기 위하여 많은 흙이 필요하다는 결정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흙을 구할 도리가 없게 되자 곤(鯀)은 천제(天帝)의 보물인 식양(息壤)이라는 신비한 흙을 훔쳐 둑을 쌓지만 천제(天帝)에게 발각되어 곤(鯀)은 천제(天帝)에게 죽임을 당하고 천제(天帝)가 식양을 도로 거두어 가자 둑은 무너져 다시 세상은 물바다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우(遇)는 이러한 물의 본능을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으로 물길이 센 곳에 오히려 천제의 도움으로 물길을 만들어 물이 적절히 흐르게 하고 사나운 물길을 잠재우고 치수에 성공하였다는 신화가 입니다.

 

이 신화는 천제가 천제의 보물까지 훔쳐서 물의 본능을 억제하는 것은 반대했지만 물의 본능을 유효 적절히 활용하는 것은 도와줌으로써 하늘도 본능을 억제하는 것은 반대하고 본능을 적극 활용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으며, 그 본능을 억제하는 것은 천제의 보물이 있어야 할 정도로 어려움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 물의 본능은 높은 곳에서 낮은 것으로 흐르는 것이며 이것의 힘 즉 수압은 물의 양에 비례한다. 따라서 곤(鯀)은 그 물의 성질을 막고 억제하는 방법을 택했고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인간들을 홍수의 재해로부터 구제하겠다는 일념으로 천제(天帝)의 보물마저 훔치는 무리수를 두게 되나 이 방법은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우(遇)가 시행한 두 번째 방법에 의하여 무리수 없이 치수에 성공하게 된다는 이야기로 이렇듯 본성을 억제하고 감추는 일은 매우 힘들고 성공의 확률도 매우 희박한 반면 이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하여 소정의 결과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힘들이지 않고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택동(毛澤東)과 등소평(鄧小平)에 비교한다면 모택동(毛澤東)은 곤(鯀), 등소평은 우(遇)에 그리고 커다란 힘을 가진 물은 지도자들을 따르는 10억 중국 사람들에 비유 할 수 있고 물이 아닌 중국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즉 치수(治水)가 아닌 치민(治民)을 위하여 모택동(毛澤東)과 등소평(鄧小平)이 택한 방법은 곤(鯀)과 우(遇)가 택한 방법만큼이나 다른 것이었습니다.

 

먼저 모택동(毛澤東)은 1958년 대약진(大躍進) 운동의 일환으로 사회주의의 기본인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위하여 인민공사(人民公司)를 시행하였으나, 이것은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 즉 본능에 반하는 제도로서 개개인이 노력했을 때 그 결과가 개인에게 귀속되지 못하는 결정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고 생산력 증대를 위한 강압적인 운동을 전개 했지만 곤(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결함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생산력은 오히려 떨어지게 되고 인민공사 제도는 흐지부지하게 되고 많은 수의 아사자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등소평(鄧小平)은 앞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지주의 집안에서 출생하여 소작인들을 다루는 방법을 일찍 터득하고 그들로 하여금 일에 적극성을 띠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므로 등소평(鄧小平)은 10억이라는 커다란 물의 흐름을 둑을 쌓고 제방을 쌓아 물의 흐름을 바꾸기 보다는 커다란 물의 흐름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중국 인민들의 본성 즉 인간의 본성인 노력에 따른 결과가 본인에게 귀속되게 하는 자본주의의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자극하여 등소평(鄧小平)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개인 소유의 농지(단간풍)를 만드는 등 기존의 제도를 개혁하게 되며, 이로써 등소평(鄧小平)은 떨어졌던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중국인민들의 불만을 해소함으로써 당시 국무원 총리였던 주은래(周恩來)를 비롯한 엽검영(葉劍英), 이선념(李先念)과 같은 중국혁명원로들과 중국인민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고 그의 능력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시작된 문화혁명으로 이러한 발전은 다시 주춤하게 되지만 모택동 사후 사인방 축출과 동시에 엽검영(葉劍英), 왕동흥(汪東興) 등의 도움으로 등소평이 다시 복권되자 그가 이전에 추진하던 정책을 다시 펼쳐 그 화려한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