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General

기본에 충실한 리더십 롬멜(Erwin Rommel)

Digital Nomad 433 2023. 11. 23. 15:45

에르빈 롬멜은 1891년에 독일 하이덴하임에서 군인이 없었던 가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수학교사로서 1차 대전의 급박한 상황이 그를 군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물론 1차 대전 중 부하 2명과 1,000여명의 프랑스군이 있는 촌락을 점령하여 그 공로로 철십자(鐵十字) 훈장을 받았고 독창성이 풍부한 장교로 인정을 받았으나, 훗날 장군이 실질적인 진면목을 발휘한 전차는 그 당시에는 발달되어 있지 않았고 원수 또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롬멜 원수가 전략가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북아프리카 전투에서지만 이렇듯 싹이 튼튼하게 자라기 시작했고, 장군이 가장 정치적이기 쉬운 히틀러 총통의 경호대장의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평생 나찌스 당에 입당하지 않았음)과 성실성으로 히틀러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보장되는 보직인 총통 경호대장에서 그는 실전에 투입을 요청하게 됩니다. 1차 대전 당시 유능한 보병지휘관으로 시작했지만 전격전을 연구하고 폴란드전투에 반영하여 당시로서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기갑부대의 지휘를 원해 프랑스 공격의 선봉이던 제 7 기갑사단장으로 부임합니다. 여기에서 장군은 ‘해군의 함포가 포를 나르기 위한 도구라면 탱크 역시 마찬가지’라며 당시 정지 시에만 포를 사용하던 관례를 깨고 탱크도 전함과 같이 달리면서 포를 쏘는 방식을 채택합니다. 여기에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화기를 사용할 때 병사들의 사기가 앙양된다는 점을 감안하여 병사들의 사기 진작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 롬멜 장군에게서 본받을 만 한 점은 많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째 실리적인 인물입니다.

그 예로 장군이 원수로 진급했을 때 원수에게 주어지는 지휘봉을 받으면서 장군은 지휘봉 보다는 1개 사단을 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겉치레 적인 계급과 지휘봉 보다는 실질적인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군이 쓰는 모래방지용 가글, 자동차(매머드)는 모두 영국제 입니다. 즉 전리품(戰利品)입니다. 토부룩을 함락시키고 상대방의 물자를 취득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영국군과 독일군을 구분하기가 어려웠다는 우스개 말도 있습니다.(심지어 영국군 전차도 개조하여 사용했습니다)

둘 째 항상 솔선수범 하는 인물입니다.

최전방에서 기관총좌나 지뢰의 매설위치를 지시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영국군의 타깃이 되어 그의 운전병이 전사하고 장군이 직접 운전을 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듯 적의 입장이 되어있는 장군의 눈을 속여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셋 째 장군은 군인이었습니다.(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한 인물입니다)

즉 자기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뿐이지 괴링 등 정치군인과는 달리 정치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점이 오히려 히틀러의 호감을 사는 원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넷 째 부하를 사랑하는 지휘관이었습니다.

이디오피아를 침공하여 영국군과의 대결로 위기에 처한 이탈리아를 지원하기 위한 전쟁인 북아프리카 전투에서는 열악한 환경 하에서도 사병들과 똑같은 식사와 생활을 하였고 군수물자 부족과 영미 양국의 물량공세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히틀러의 반대를 무릅쓰고 퇴각을 단행합니다. 부하들의 사기앙양을 위하여 퇴각 중에도 간간히 영국군에게 결정타를 주고 부하들의 사기가 회복되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퇴각하는 방법으로 부하들이 패배로 인한 자괴감에 빠져들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이로서 장군은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귀국합니다. 그러나 전세가 더욱 악화되자 히틀러는 다시 장군에게 북아프리카로 갈 것을 명령합니다. 그 때에도 장군은 히틀러에게 "내 부하들을 그렇게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대답과 함께 북아프리카로 복귀합니다.

다섯째 가정적인 한사람의 남자였습니다.

장군은 그 힘든 전쟁 중에도 가족들과의 만남, 휴가를 활용하였고 그의 가족을 사랑하였음을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그의 가족의 안녕에 최소한의 영향을 미치는 방법을 택하게 됩니다. 현대의 사회생활에 쫓기는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44년 7월20일 독일 장교들의 히틀러 암살음모가 있었고 히틀러는 암살위기를 모면했는데 장군이 음모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음모의 주동자들이 음모성공 후 장군을 옹위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히틀러는 장군에게 그가 자살함으로써 가족들의 안전을 도모할 것인지, 아니면 공개재판과 처형, 그리고 그에 따른 불명예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제안했고 장군은 항상 주변사람들을 걱정했듯이 주변사람들을 위하여 히틀러가 보낸 독약을 먹고 자살함으로써 53세로 영웅적 군인생애를 마감했는데 히틀러도 사후에 장군을 위한 동상을 건립할 정도로 장군의 명성을 두려워한 만큼 직업군인으로서 뛰어난 전문성과 존엄성을 갖춘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아이러니 한 일은 한때 히틀러의 경호대장이었던 장군이 총통암살모의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롬멜 장군은 군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